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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릇>, 김윤나 본문
한 사람의 공식 속에는 숨겨진 배경과 충분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 삶을 직접 살아보지 않고 공식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공식이 무엇인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어떠한 말로도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음을 기억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즐겨 사용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어?" "네 결정에 영향을 준 기준은 뭐야?" 질문을 통해 내막을 듣게 되면, 동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네.'하며 인정해주는 것은 가능해진다. 내게도 나름의 공식이 있듯이 타인에게도 고유의 공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더라도 강요하지 않는다. 조언은 하지만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말 그릇을 다듬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살면서 반드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거나,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거나, 대단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말 그릇을 매만지고 보듬는 일만큼은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움직임을 의식하고, 살피고, 책임을 지는 일이 곧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은 마음을 따라 자란다.
얼마 전 SNS에 '노숙자의 운명을 바꾼 작은 관심'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미국 뉴햄프셔에 사는 한 여인이 도넛 가게에서 노숙자를 보게 되었다. 1달러를 들고 무언가를 사먹기 위해 서성거리던 노숙자가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결국 그에게 커피와 베이글을 주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노숙자는 마약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연,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악필이어서 미안하다며 영수증에 급하게 무엇인가를 적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가 남긴 영수증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오늘 자살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당신 덕분에 그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고마워요." 나는 잠깐 그 여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노숙자를 보는 순간 느낀 연민의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불안감도 섞여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한 감정을 찾아내고 인지하고 용기 있게 그것을 드러내 보였다. 노숙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자신의 관섬에서 판단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공식을 기준 삼아 비난하거나 조언하지 않았다. 노숙자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물론 낯선 노숙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대범함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 여성이 보여주었던 그 용기와 유연함을 내 곁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된다. '회사 다니기 힘들다'는 남편에게 '당신의 수고에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면 되고, 성적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괜찮아.'하며 다독일 수 있을 정도의 유연함이면 족하다.
10대 시절, 나의 말은 화로 가득 차 있었다. 날 버리고 간 엄마, 세상에 뒤떨어진 아빠, 월세 인생이 지긋지긋해서 내 말은 늘 공격적이었다. 스스로르 지키기 위해 강한 척했고,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이렇게 해도 나를 우습게 볼 거야?'라는 마음 안에서 따뜻한 말이 자라기는 힘들었다. '아프다, 도와 달라'는 말 대신 괜찮은 척하느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른인 척해도 내가 내뱉는 말들은 한없이 어렸다.
20대에 했던 말들은 성공을 쫓는 말이었다. 잘나가고 싶었다. 보란 듯이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나를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려고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말은 사람까지 보살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말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해했다.
그러다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와 내가 하고 있는 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말 대신 진짜 나다운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말을 비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와 내 감정과 마음을 더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자연스러워지고 생각에 유연함이 생겼다. 예전처럼 과장하는 대신 내게 어울리는 편안한 말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주변사람들이 그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말 그릇이 깊고 넓어지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나는 이제 곧 40대를 맞이한다. 이제 내 말은 또 어떻게 변하게 될까. 어느덧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다. 이제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을 담아내고 위로하고 손잡아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첫째 아들은 이 책을 쓰는 동안 다섯 살이 되었다. 위험한 장난이 부쩍 늘었고 고집도 세졌다. 얼마 전 동생을 맞이해서 그런지 감정기복도 심해졌다. 그런 아들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들, 엄마는 네가 장난칠 때도 변함없이 사랑해."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엄마, 고마워."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아들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진심으로 안도하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은 네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겠지. 엄마가 사라져도 이 말은 남겠지.'
요즘에는 그런 마음으로 말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내 말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그러다 보면 어떤 말도 쉽게 할 수가 없다. 아이가 세상에서 넘어질 때마다 엄마의 말을 꺼내어 본다고 생각하면 말로 아이를 매질할 수 없다. 남편에게도,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동료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렇다.
말은 자란다. 어릴 적의 나는 '자라게 하는 말'을 많이 듣지 못했다. 하지만 듣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면에 상처 많은 어린아이를 숨겨두고 살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더디기는 했지만 조금씩 성장했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돌아볼 만큼 넓어졌다. 이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 삶의 과제들이 말그릇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담금질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사소한 책임을 다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시간들 틈에서 내 말 그릇이 또 조금씩 자라날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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